제11화

황혼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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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2분

하늘은 끝없이 짙은 저녁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양은 지평선 끝자락에 걸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고, 보랏빛과 붉은빛이 뒤엉킨 기괴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발밑에는 모래사장처럼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모래 언덕.

하지만 그것은 모래가 아니었다.

살이 부러진 비닐우산, 빛바랜 인형, 짝 잃은 장화, 잉크가 닳아버린 볼펜, 끊어진 교통카드 지갑――.

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주인에게 잊혀 영영 마중 나오지 않은 분실물들이 바다처럼 끝없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악! 뭐야 여기, 발밑이 온통 분실물투성이잖아!"

호시카와 코하루 곁에서 이누카이 타이가가 비명을 질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버석버석, 삐걱삐걱 오래된 금속과 플라스틱의 메마른 마찰음이 울렸다.

"포, 포케에엣! 털실 사이에 이상한 단추가 끼었다폿케! 좀 빼줘라폿케~!"

코하루의 노란 케이프 주머니에서 빨간 장갑 츠쿠모가미 폿케가 얼굴을 내밀고 바둥거렸다.

"쉿, 폿케, 조용히 해. ……아야메, 괜찮아?"

코하루가 돌아보자 구조 아야메는 제비꽃색 리본을 누르며 발밑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발 디딜 곳이 최악이네. 하지만 더 경계해야 할 게 있어. 저기 널브러진 시계들을 보렴."

아야메가 가리킨 곳에는 언덕에 비스듬히 박혀 있는 무수한 알람시계와 탁상시계들이 있었다.

커다란 괘종시계도, 조그만 손목시계도, 모든 시곗바늘이 오후 5시 정각을 가리킨 채 뚝 멈춰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어디선가 오르골 같은 금속음이 짤랑…… 짤랑…… 쓸쓸하게 울려 퍼졌다.

"야옹."

그때 발치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오며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실물의 관에 살고 있는 고양이 미코였다.

미코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모래 언덕 너머로 총총 걸어가더니 뒤를 돌아보며 손짓하듯 울었다.

"미코! 길을 안내해 주려는 거야?"

코하루가 말을 건네자 미코는 목을 골골 울리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긴 지 수십 분이 지났을 무렵――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머릿속이 쏴아 하고 시리게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덮쳐온 것이다.

"……어라?"

맨 앞에서 걷고 있던 아야메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수첩을 열려던 가느다란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야메, 왜 그래?"

"……나…… 어머니 생신이…… 몇 월 며칠이었더라……? 매년 별맞이 언덕에서 별똥별을 보던 소중한 날인데…… 날짜가…… 기억나지 않아……."

아야메의 제비꽃색 눈동자에 짙은 동요의 빛이 일렁였다.

"나, 나도 그래!"

타이가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싸매며 주저앉았다.

"나…… 축구부 등번호가 몇 번이었지!? 할아버지 이름이…… 음, 겐…… 맞나? 아니, 나 혹시 개였나!?"

"타이가는 인간이다폿케! 코만 밝은 그냥 먹보 인간이다폿케!"

폿케가 소리쳤지만 폿케의 목소리도 어딘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코하루 자신의 가슴속으로도 차가운 안개가 들이닥쳤다.

(빵집의…… 멜론빵 맛이…… 어땠더라? 아빠랑 엄마의 얼굴이…… 흐릿해져서……)

"방심하지 마!"

아야메가 소리치며 만년필을 꽉 쥐었다.

제비꽃색 가죽 수첩―― 『물망초 수첩』의 백지 페이지에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거칠게 써 내려갔다.

『호시카와 코하루. 구조 아야메. 이누카이 타이가. 폿케.

우리는 쓰키미자카 초등학교의 분실물 탐정단.

요미 카나타를 데려와 모두 함께 반드시 마을로 돌아간다.』

아야메는 고개를 번쩍 들고 수첩을 가슴 앞에 높이 치켜들었다.

"소리 내어 읽어! 이 수첩에 적힌 진실은 그 어떤 어둠으로도 결코 지울 수 없어! 잊어버리면 몇 번이고 수첩을 읽고 다시 기억해 내는 거야!"

"응……! 우리는 분실물 탐정단이야!"

"카나타를 데리고 다 같이 돌아가는 거다!"

세 아이와 장갑 요정이 목소리를 모아 외치자 머릿속의 차가운 안개가 싹 걷혀 나갔다.

미코가 "야옹" 짧게 울며 전방의 거대한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모래 언덕 저편, 저녁노을빛 하늘을 꿰뚫듯 우뚝 솟아 있는 것은 새까만 금속으로 지어진 거대한 시계탑이었다.

시계판의 바늘은 역시나 5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다……! 저 꼭대기에 카나타가 있다폿케!"

폿케의 털실이 찌릿찌릿 불꽃을 튀기듯 세차게 반응했다.

하지만 시계탑 기슭에 다다랐을 때, 대지가 쿠구구궁 땅울림을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타이가가 자세를 낮춘 순간, 발밑의 분실물 더미가 화산처럼 솟구쳐 올랐다.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버려진 수많은 물건을 집어삼켰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노라모노들의 무리였다.

살이 부러진 검은 우산 수십 개가 합체한 거대한 거미 괴물.

닳아 빠진 가죽구두와 운동화들이 지네처럼 엮인 기다란 그림자.

그리고 무수한 녹슨 자명종 시계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굴러다니는 거대한 종소리의 괴물.

『돌려줘…… 돌려줘…… 너희의 소중한 기억을 내놓아라아아앗!』

비명 같은 처절한 외침이 모래 언덕을 뒤흔들었다.

"포, 포케에엣! 노라모노들의 대폭탄 세일이다폿케!"

"이 정도 숫자면 별 랜턴으로도 한꺼번에 다 정화할 수 없어……!"

아야메가 수첩을 품에 안고 뒷걸음질 쳤다.

시계탑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돌계단을 무수한 검은 그림자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카나타에게 닿기도 전에 포위당해 모든 기억을 빨려버리고 만다.

바로 그때였다.

"코하루! 앞만 보고 달려!"

쾅ーー!

강력한 충격음과 함께 맨 앞의 신발 괴물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타이가였다.

발밑에 굴러다니던 낡은 가죽 축구공을 대포알 같은 발리슛으로 괴물의 안면에 정통으로 꽂아 넣은 것이다.

"타이가!?"

"여긴 우리한테 맡겨! 카나타가 기다리고 있잖아! 어서 가아아앗!"

타이가는 콧등의 반창고를 누르며 덧니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이누카이 군, 무모해!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혼자가 아니잖아, 반장! 내 등 뒤에는 네 날카로운 추리가 받쳐주고 있거든!"

타이가의 말에 아야메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이내 당돌한 미소를 지으며 만년필을 고쳐 쥐었다.

"……그래. 정황 증거는 절망적이지만 승률은 제로가 아니야!"

아야메는 찰나의 순간에 모래 언덕의 지형과 괴물들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날카롭게 지시를 내렸다.

"이누카이 군, 바람은 왼쪽에서 불어! 우산 괴물은 뼈대가 부실해! 모래를 차올려 시야를 빼앗고 오른쪽 낭떠러지로 유인해!"

"좋았어! 질풍의 순록, 드리블 돌파다아아앗!"

타이가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괴물 무리를 종횡무진 유인하기 시작했다.

아야메가 냉철하게 약점을 파악해 정확한 타이밍에 지원 사격을 지휘했다.

두 사람은 환상의 호흡으로 탑으로 향하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코하루, 어서 가!"

아야메가 돌아보며 외쳤다.

"카나타 군을 데려올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내 파트너를 믿어!"

"둘 다…… 꼭 무사해야 해!"

코하루는 눈물을 훔치고 폿케와 함께 돌계단을 힘차게 뛰어올라 갔다.

"우릴 누구로 보고 덤비는 거냐! 분실물 탐정단을 얕보지 마라ーー앗!"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타이가의 우렁찬 함성과 아야메의 맑은 목소리를 등에 업고, 코하루는 단숨에 시계탑의 나선형 계단을 내달렸다.

나선형 계단을 다 오르자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드넓은 개방형 층이 나타났다.

머리 위에서는 거대한 황동 톱니바퀴들이 소리 없이 맞물려 돌아가며 저녁노을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층의 한가운데――.

거대한 원형 유리판으로 덮인 시계판 모양의 캡슐이 놓여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유리 안쪽에 한 소년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은빛 머리칼, 짙은 감색 코트 재킷. 목에는 푸른 머플러.

"카나타 군……!"

코하루가 달려가려던 바로 그 순간――.

쿠오오오오옷!

천장에서 폭포수 같은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내렸다.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푸른 물망초 꽃을 머리에 피운 거대한 그림자―― 와스레나가 유리 시계를 가로막아 섰다.

『또 왔느냐, 조그만 장갑아.』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져 서늘하게 울렸다.

『몇 번을 와도 소용없다. 저 아이는 이미 제 이름조차 잊어버렸어. 이곳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영원한 망각의 나라란다.』

"거짓말 마!"

코하루는 주황색 케이프를 펄럭이며 당차게 외쳤다.

"카나타 군은 잊지 않았어! 엄마의 머플러를 기억하고 있었어! 남의 소중한 추억을 빼앗는 걸 거부하고 제 손으로 가면을 깨뜨렸단 말이야!"

와스레나의 그림자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건방진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그렇다면 너부터 먼저 지워주마!』

콰아아앙!

와스레나가 팔을 내리치자 시커먼 안개의 해일이 코하루를 덮쳐왔다.

"별 랜턴, 오픈!"

코하루는 랜턴을 치켜들어 눈부신 빛의 방패를 펼쳤다.

하지만 와스레나의 어둠의 무게는 체육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랜턴의 빛이 짓눌려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코하루의 손발을 휘감고, 시린 냉기가 살갗을 뚫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머…… 리가…… 차가워…….)

생각이 꽁꽁 얼어붙어 갔다.

소중한 기억들이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스르르 지워져 갔다.

(나……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주황색 빛이 점점 작아져 갔다.

(학교……? 검은 머리에 보라색 리본을 맨 여자아이…… 누구였더라……?)

(콧등에 반창고를 붙인…… 시끄러운 남자아이…… 누구였지……?)

(빵 냄새…… 아빠…… 엄마…….)

"코하루! 정신 차려라폿케! 눈 떠라폿케!"

가슴팍에서 필사적으로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빨간 털실 뭉치가 코하루의 뺨에 차가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조그만 손으로 찰싹찰싹 볼을 때리고 있었다.

"코하루는 호시카와 코하루다폿케! 멜론빵 끄트머리를 좋아하고, 매일 깜빡깜빡하고, 오지랖쟁이에…… 하지만 그 누구의 분실물도 절대 모른 척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내 최고의 파트너다폿케!"

"폿…… 케……?"

"잊지 마라폿케! 코하루가 날 찾아내 주었잖아폿케! 코하루우우우!"

폿케의 외침마저 어둠의 파도에 집어삼켜지려 했다.

코하루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져가려던 바로 그 순간――.

삐이이이이이익―――!

맑고 청아한 높은 피리 소리가 시계탑 밑바닥에서부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분실물의 관의 시오리 씨가 타이가에게 맡겼던 『되부름의 피리』 소리였다.

황혼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불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영혼을 향해 곧장 목소리가 닿는다는 기적의 나무 피리.

삐이이이이이익―――!

피리 소리에 이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절규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코하루우우우! 포기하지 마아아아! 우리 이름을 잊어버리면 절대 용서 안 할 테다아앗!』

타이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뒤이어 맑고 단호한 외침이 들려왔다.

『코하루! 증거를 기억해 내! 네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그 모든 소중한 약속들을!』

아야메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와 부름이 얼어붙어가던 코하루의 심장 깊은 곳을 한 발의 빛의 화살처럼 꿰뚫었다.

쿵! 심장이 세차게 박동했다.

차가운 안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나는……."

코하루의 두 눈에 번쩍이는 강한 빛이 되살아났다.

"나는 호시카와 코하루! 쓰키미자카의…… 분실물 탐정단 코하루야!"

"별 랜턴…… 빛이여, 타올라라아아앗!"

코하루가 외치자 가슴의 랜턴에서 한낮의 태양 같은 폭발적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몸을 옭아매던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증발하고 와스레나의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크아아악! 빛이…… 빛이 꺼지지 않아……!』

"폿케, 지금 단숨에 가는 거야!"

"맡겨달라폿케!"

폿케가 코하루의 왼손에 끼워지며 손목의 하얀 털 방울이 별처럼 반짝였다.

바로 그때였다.

폿케의 빨간 털실에서 가느다란 빛의 실 한 가닥이 술술 풀려나오듯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붉고 따스하게 빛나는 실.

주인과 분실물을 이어주는―― 『기억의 실』이었다.

"포, 포케에엣!? 내 몸에서 기억의 실이 나오고 있다폿케!"

빨간 실은 허공을 날아 유리 시계 캡슐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카나타의 가슴팍―― 감색 코트 안주머니 속을 향해 곧장 이어졌다.

"저기다……!"

폿케가 외쳤다.

"내 반쪽 장갑…… 저 녀석 안주머니 속에 잠들어 있다폿케!"

"카나타 군의 주머니에……!?"

코하루는 바닥을 박차고 유리 시계 앞으로 달려갔다.

두 손을 차가운 유리판 위에 찰싹 올려놓았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카나타가 잠들어 있었다.

손이 닿는 순간 코하루의 손바닥에서 별 랜턴의 따스한 빛과 폿케의 빨간 실의 온기가 유리를 타고 카나타의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두근……

그 순간 코하루의 뇌리 속으로 엄청난 기억의 조각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억의 깊은 바닥에서 굳게 잠겨 있던 자물쇠가 딸깍 소리를 내며 풀려버린 것이다.

(어……? 이…… 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겨울.

색색의 축제 등불이 일렁이던 쓰키미자카 겨울 축제의 해 질 녘.

5시 차임벨이 울려 퍼지던 언덕길 한구석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고 있던 은빛 머리의 어린 남자아이.

그 아이의 얼어붙은 오른손에 제 조그만 빨간 장갑 한 짝을 쏙 끼워주던 다섯 살 코하루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 너를 만난 적이 있어."

코하루의 호박색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줄곧…… 아주아주 옛날부터……!"

제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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