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타이가와 할아버지의 축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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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2분

금요일 아침. 평소라면 온 학교에 울려 퍼졌을 우렁찬 목소리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아아암……."

5학년 2반 교실 한가운데에서 깊고 무거운 한숨 하나가 땅이 꺼져라 터져 나왔다.

책상에 푹 엎드려 축 늘어져 있는 아이는 초록색 축구 유니폼을 입은 이누카이 타이가였다. 콧등에 붙인 반창고마저 기운을 잃고 삐뚤어져 있었다.

"이누카이 군, 아침부터 한숨이라니 별일이네. 바람 빠진 풍선 인형 같아."

등교한 학급 반장 구조 아야메가 가죽 추리 노트를 안은 채 눈살을 찌푸렸다.

"타이가, 무슨 일 있어? 감기라도 걸린 거야?"

호시카와 코하루가 걱정스레 책상 앞으로 다가가 들여다보자, 타이가는 굼뜨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코하루…… 반장…… 나 이제 끝장이야……."

"끝장이라니 뭐가!? 내일 가을 주니어 축구 대회 준결승이잖아!"

"그 대회에 못 나갈지도 모른단 말이야……."

타이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

"축구공이…… 없어졌어."

"축구공?"

"겐 할아버지가 사 주신 소중한 축구공이란 말이야! 전직 축구 코치셨던 할아버지가 내가 처음 축구를 시작한 날 사 주셨던 소중한 가죽 축구공…… 팀 친구들이 써 준 롤링페이퍼 응원 메시지도 적혀 있는 내 최고의 보물이라고!"

타이가는 소문난 할아버지 바라기다. 호쾌하고 엄격하신 겐 할아버지이지만, 타이가가 연습을 마치고 진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늘 껄껄 웃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공은 둥그니까 굴러야 제맛이지!' 하시면서 할아버지는 매일 밤 오래된 가죽 크림으로 내 공을 반짝반짝 닦아주셨어. 그 공을 차면 발끝에서 힘이 펄펄 솟아났다고. 내일 시합 때 그 공을 벤치에 두고 함께 싸우기로 약속했는데…… 어제 연습 끝나고 어디론가 데굴데굴 굴러가 버려서……."

타이가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늘 당당하던 타이가가 이렇게 작아진 모습은 처음 보았다.

코하루는 아야메와 시선을 마주쳤다.

"찾자, 타이가! 우리 '분실물 탐정단'이잖아!"

"호시카와 양 말이 맞아."

아야메가 안경 너머 눈동자를 또렷하게 빛내며 제비꽃색 '물망초 수첩'을 펼쳤다.

"동료가 곤경에 처한 걸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 탐정단의 이름에 먹칠하는 짓이야. 이누카이 군, 마지막으로 공을 본 장소로 안내해 줘!"

타이가는 번쩍 고개를 들고 유니폼 소매로 눈물을 벅벅 훔쳤다.

"너희들……! 고마워!"

방과 후.

코하루 일행 세 사람은 쓰키미자카 언덕 아래로 흐르는 강변 운동장으로 향했다.

넓은 잔디밭과 흙으로 된 운동장. 어제저녁 타이가가 혼자서 슛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연습이 끝난 건 5시 직전이었어. 마지막으로 강력한 롱슛을 날렸는데 골대를 맞고 높이 튕겨 나가더니…… 풀숲 쪽으로 사라져 버렸지 뭐야."

"흠…… 어제는 강한 남풍이 불었지."

아야메가 수첩에 만년필을 굴렸다.

"흙의 경사와 바람 방향을 고려해 계산해 보면, 공은 둑을 따라 굴러떨어져 강변 산책로 쪽으로 향했을 거야."

"킁킁……! 잠깐만!"

타이가가 엎드려 바닥에 코를 들이댔다.

"이누카이 군, 바닥 냄새를 맡는 건 그만두라고 몇 번을……."

"아니라고! 내 땀 냄새랑 할아버지가 늘 공에 발라주시던 오래된 가죽 크림 냄새가 나! 저쪽이야!"

타이가가 벌떡 일어나 강변의 덤불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단한 코네…… 논리를 초월했어."

아야메가 어이없어하면서도 감탄했다.

코하루의 주머니에서 폿케가 퐁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코하루! 나도 무슨 냄새가 난다폿케! 가죽 냄새랑…… 오래된 진흙 냄새다폿케!』

"서두르자!"

타이가의 개코와 아야메의 계산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자 길은 쓰키미자카 철길 아래를 통과하는 오래된 붉은 벽돌 터널로 이어졌다.

대낮에도 어스레하고 벽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똑, 똑……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히익~! 축축해서 털실이 쪼그라들 것 같다폿케~!』

폿케가 비명을 지르며 코하루의 후드 속으로 쏙 숨어들더니 끈을 꽉 잡아당겨 코끝만 쏙 내밀었다.

"여, 여기는……."

맨 앞에서 달리던 타이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갓 태어난 사슴처럼 무릎이 딱딱 소리를 내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타이가?"

"나, 나왔다…… 언덕 아래, 귀신 터널이다아아……!"

타이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선배들이 말해줬단 말이야…… 옛날에 지어진 터널인데 해 질 녘이 되면 벽에서 귀신 손이 불쑥 튀어나와서 끌고 들어간다고……! 나, 난 무리야! 절대 안 들어갈 거야아아!"

"방금 전까지의 호기는 다 어디로 갔담, 이누카이 군."

아야메가 팔짱을 꼈다. 하지만 아야메 역시 어둑한 터널 안쪽을 바라보며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

"무, 물론 유령 같은 건 비과학적인 미신이지만…… 조금 으스스하긴 하네."

"괜찮아, 둘 다! 손잡자!"

코하루는 타이가와 아야메의 손을 꼭 쥐었다.

"타이가의 소중한 축구공이 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잖아!"

바로 그때였다.

뎅, 뎅, 뎅…….

마을 스피커에서 오후 5시를 알리는 저녁노을 차임벨이 울려 퍼졌다.

노을빛 하늘이 주홍빛에서 보랏빛으로 물들고, 터널 입구 위로 짙은 황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타이가…… 타이가…… 어디 있어……?』

터널 안쪽 깊은 곳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울려왔다.

『……어두워…… 차가워…… 같이 골 그물을 흔들고 싶어……』

"축구공의 목소리야!"

코하루가 외치자 타이가가 숨을 들이켰다.

"고, 공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거야……!?"

"응! 타이가를 기다리고 있어!"

"간다!"

타이가는 공포를 떨쳐내듯 소리를 지르며 터널 안으로 번쩍 뛰어들었다.

터널 내부는 바깥보다 훨씬 더 쌀쌀했다.

발소리가 찰박찰박 울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철길 바로 아래쯤에서 검은 안개가 뭉게뭉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쿵! 쿵!

어둠 속에서 수많은 공이 바닥을 튀기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다가왔다.

"히이익!?"

폿케가 코하루의 후드 속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수십 개의 낡은 공들―― 새빨간 피구공, 털이 다 빠진 테니스공, 낡은 고무공들이 검은 연기로 한데 뒤엉킨 '공 눈사람' 형태의 노라모노였다!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데굴데굴 구르며 땅을 뒤흔들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 거대한 눈사람 괴물의 가슴 한가운데에――.

친구들의 응원 글이 가득 적힌 타이가의 흑백 축구공이 검은 안개에 얽매인 채 울고 있었다.

『타이가…… 구해줘……!』

"축구공아!"

타이가가 절규하듯 외쳤다.

노라모노는 성난 듯 으르렁거리며 거대한 몸집을 쿵쿵 튕기며 코하루 일행을 향해 돌진해 왔다!

쾅ーー!

터널 벽에 부딪치며 붉은 벽돌 파편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히, 히이익! 너무 크잖아! 깔려 뭉개지겠어ーー!"

타이가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면 안 돼, 타이가!"

코하루는 소리치며 타이가의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공의 목소리를 들어봐! 공이 말하고 있잖아!"

"어……?"

"『타이가가 첫 골을 넣었던 날, 할아버지가 엉엉 울면서 기뻐해 주셨어. 난 타이가의 웃는 얼굴이 제일 좋으니까 내일도 같이 골 그물을 흔들고 싶어』라고!"

별 돋보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축구공의 소중한 기억을 코하루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저 축구공은 할아버지의 사랑과 타이가의 꿈이 담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이란 말이야!"

타이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을 넣었던 날.

평소엔 좀처럼 웃지 않으시던 엄격한 겐 할아버지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눈물을 펑펑 쏟으셨고, 날 힘껏 안아주셨다.

『장하다, 타이가! 넌 내 최고의 스트라이커다!』

"……그래."

타이가의 무릎에서 떨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주먹을 불끈 쥐고 땅바닥을 힘차게 딛고 일어섰다.

"난…… 무적의 스트라이커다! 내 최고의 파트너를 두고 도망칠 수 있겠냐아아앗!"

타이가가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돌진해 오는 거대한 노라모노의 정면을 향해 두려움 없이 몸을 던졌다!

"이누카이 군, 위험해!"

아야메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타이가는 멈추지 않았다.

굴러오는 괴물의 발치로 기가 막힌 슬라이딩 태클을 날렸다!

스스스슥ーー!

타이가의 오른발이 괴물의 회전축을 정확하게 가로막았다.

균형을 잃은 노라모노의 품에서 타이가의 축구공이 퐁 하고 높이 솟구쳐 올랐다!

"코하루! 지금이다ーー!"

타이가의 외침이 터널 안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그 \"분실물\", 제가 전해 줄게요!"

코하루는 왼손을 뻗었다.

"폿케, 가자!"

"맡겨달라폿케!"

폿케가 왼손에 끼워지고 코하루는 별 돋보기를 치켜들었다.

"별 돋보기, 오픈!"

키이이잉――!

별 돋보기의 빛이 어두컴컴한 터널을 한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노을빛 주황색 탐정 케이프가 멋지게 펄럭였다.

코하루는 공중에 떠오른 축구공과 홀로 남겨진 공 눈사람 괴물을 바라보았다.

렌즈 너머로 수십 개의 공들이 간직해 온 기억들이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방과 후 운동장. 강변에서 주고받던 캐치볼.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의 웃는 얼굴.

잊히고 잃어버려서, 어두운 풀숲이나 도랑에 빠져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던 공들의 슬픈 눈물.

"모두 신나게 뛰어놀았구나."

코하루는 가슴이 뭉클해져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너희를 뒤쫓던 아이들의 땀방울도, 웃음소리도 결코 사라지지 않아.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어!"

괴물의 둥근 눈이 온화하게 가늘어졌다.

"찾았다. ――어서 와, 분실물아!"

슈아아아악!

황금빛 빛의 고리가 터널 안 가득 퍼져나갔다.

검은 안개가 스르르 사라지고 수많은 옛날 공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빛의 알갱이로 변해갔다.

『……고마워……』

수십 명의 아이들의 목소리가 겹쳐져 메아리치고, 빛의 알갱이들은 터널을 빠져나가 옛 주인들이 살고 있는 온 마을의 집들로 날아갔다.

그리고――.

사뿐히 떨어져 내린 흑백 축구공을 일어선 타이가가 두 손으로 꼭 받아냈다.

"축구공아……!"

타이가는 공을 가슴에 품고 얼굴을 파묻은 채 엉엉 울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이누카이 군, 진흙투성이야. 하지만…… 훌륭한 슬라이딩이었어."

아야메가 수첩을 닫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헤헷, 난 무적의 스트라이커니까!"

코를 훌쩍이는 타이가를 보며 코하루와 아야메는 소리 내어 웃었다.

다음 날.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쓰키미자카 운동공원 축구장에서 가을 주니어 선수권 대회 준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삐이이익――!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지는 순간, 관중석에서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해냈다ーー! 타이가가 넣었어ーー!"

코하루와 아야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원 메가폰을 흔들었다.

후반전 추가 시간, 타이가가 날린 통렬한 발리슛이 골 그물을 시원하게 뒤흔들었던 것이다.

결승 진출을 확정 지은 타이가는 벤치 옆에 놓아두었던 소중한 롤링페이퍼 축구공을 번쩍 치켜들고 운동장을 자랑스럽게 내달렸다.

스탠드 맨 앞줄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시던 겐 할아버지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함을 지르셨다.

"타이가아아앗! 장하다아아앗! 오늘 저녁은 특대 왕돈가스다ーー!"

타이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는 할아버지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환한 미소를 보며 코하루의 가슴속도 벅차오르는 행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열기로 가득 찬 관중석 맨 구석 그늘에 한 소년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을 코하루는 놓치지 않았다.

짙은 감색의 긴 코트에 목에는 푸른 머플러.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요미 군이었다.

코하루의 주머니 속에서 폿케가 가늘게 떨었다.

『코하루…… 역시 저 녀석이 있으면 내 털실이 찌릿찌릿 곤두선다폿케……!』

"요미 군…… 응원하러 와준 걸까……?"

코하루가 말을 걸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요미 군은 뒤돌아서서 인파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날 밤.

쓰키미자카의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언덕 위 오래된 양옥집 뒤편의 어둠 속에서 요미 군―― 괴도 미드나이트가 차가운 밤바람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검은 안개가 일렁이며 거대한 소녀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안개로 된 머리칼 틈새로 푸른 물망초 꽃이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후후…… 카나타. 추억 모으기는 잘 되어 가니?』

여러 겹으로 겹쳐진 달콤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년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회중시계를 꽉 쥐었다.

"……오늘 밤 수확은 없다. ……앞으로, 여든한 개."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 닥치고, 푸른 꽃이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흔들렸다.

제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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