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아야메의 추리 노트
"학급비 봉투가 사라졌어."
목요일 방과 후. 저녁노을이 길게 드리운 5학년 2반 교실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탁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은 학급 반장인 구조 아야메였다.
검은 생머리를 가지런히 자르고 제비꽃색 리본을 묶은 반듯한 얼굴. 감색 멜빵치마에 단정한 하얀 블라우스, 손에는 언제나처럼 가죽 표지의 추리 노트와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학급비……? 다음 주 사회과 견학 버스비 모아둔 그 봉투 말이야!?"
앞자리에서 이누카이 타이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청을 높였다.
"그래. 모리 선생님께서 교무 회의에 가시기 전 교탁 서랍에 넣어두셨던 봉투야. 안에는 전원의 회비 4만 엔이 들어 있었어."
교실에 남아 있던 반 친구들이 불안한 얼굴로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야메는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매로 교실 안을 조용히 둘러보고는 노트를 탁 넘겼다.
"종례가 끝난 시각은 4시 15분. 그 후 모리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가셨고 교실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어야 했어. 하지만―― 4시 반쯤, 교실로 돌아온 사람이 딱 한 명 있어."
아야메의 시선이 코하루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어? 나?"
"호시카와 양. 바로 너야."
"으, 응…… 리코더를 책상 옆에 또 깜빡 두고 온 게 생각나서 가지러 온 거였는데……."
"서랍에서 봉투가 사라진 시간은 4시 15분부터 4시 45분 사이. 그 시간에 이 교실에 들어온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모든 정황 증거가 너를 가리키고 있어."
"그, 그럴 리가 없어……! 난 훔치지 않았어! 서랍 근처엔 손도 안 댔단 말이야!"
코하루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가슴속이 쿵 내려앉으며 눈앞이 새하얘졌다.
"야, 반장! 코하루가 그럴 리가 없잖아!"
타이가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코하루가 덜렁대고 툭하면 깜빡하긴 해도 남의 물건에 손댈 녀석이 아니라고! 그건 내가 장담해!"
"감정적인 주장은 무의미해, 이누카이 군."
아야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난 오직 사실과 기록만을 믿어."
"뭐, 뭐라고……!"
"타이가, 잠깐만."
코하루는 타이가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의심을 받은 건 너무 슬프고 가슴이 미어질 만큼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야메의 눈동자 깊은 곳에 아주 희미한 망설임의 빛이 스치는 것을 코하루는 보았다. 아야메는 심술을 부리며 코하루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학급 반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진실을 밝혀내려는 것뿐이었다.
"구조 양."
코하루는 가슴 가득 숨을 들이마시고 아야메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 정말 안 훔쳤어. 그러니까―― 같이 진짜 진실을 찾아내자!"
아야메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네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어울려 줄게."
교실 현장 검증이 시작되었다.
아야메는 교탁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노트에 만년필을 굴렸다.
"교탁 서랍에 열쇠는 잠겨 있지 않았어. 손잡이에 지문을 닦아낸 흔적도 없고. 그리고…… 창문이야."
아야메는 창가로 다가가 창틀 틈새를 가리켰다.
"창문이 10센티미터쯤 열려 있어. 오늘은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남풍이 무척 강했어. 만약 돌풍이 들이쳤다면……."
"킁킁……! 야, 무슨 냄새가 나는데!"
갑자기 바닥에 코를 박고 있던 타이가가 소리쳤다.
"이누카이 군, 비위생적이야. 바닥 냄새를 맡다니 당장 그만둬."
"아니라고! 내 코는 경찰견 뺨친단 말이야! 달콤한 빵 냄새랑…… 낡은 종이 냄새가 창밖을 향해 이어지고 있어!"
타이가의 말에 코하루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빵 냄새는 내 주머니 속에 든 멜론빵 부스러기……? 하지만 낡은 종이 냄새는……!)
코하루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교실은 2층. 창문 바로 아래에는 저학년 화단과 그 너머 사육장―― 토끼장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뎅, 뎅, 뎅…….
스피커에서 저녁노을 차임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오후 5시를 알리는 오르골 선율.
하늘이 순식간에 노을빛 주황색으로 물들고, 바람의 온도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황혼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파닥파닥…… 바람이 차가워…… 토끼야, 밟지 마……』
귓가에서 작은 종이가 파닥이는 듯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렸어……!"
코하루의 어깨 쪽에서 주머니 밖으로 얼굴을 내민 폿케가 쫑긋 귀를 세웠다.
『코하루! 뒤뜰 풀숲에서 종이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폿케!』
"응! 봉투는 뒤뜰에 있어! 토끼장 근처야!"
코하루가 외치자 아야메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봉투의 목소리라고? 호시카와 양, 그런 비과학적인 헛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아?"
"잔말 말고 따라와 봐! 진짜란 말이야!"
코하루는 아야메의 손을 덥석 잡고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어스름이 짙게 깔려가는 학교 뒤뜰.
토끼장의 철망 너머로 하얗고 갈색인 토끼들이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토끼장 옆 수풀을 살그머니 들여다보자――.
"있다!"
키 작은 나무 잎사귀에 걸린 채 커다란 갈색 봉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학급비 5학년 2반』이라고 모리 선생님의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정말 있었잖아……! 바람에 날려 창밖으로 떨어진 뒤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던 거구나……."
아야메가 놀란 목소리를 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호시카와 양, 네 말이 맞았어. 널 의심해서 정말――"
바로 그때였다.
쿠오오오……!
토끼장 안쪽 어둑한 풀숲에서 축축하고 검은 안개가 사납게 뿜어져 나왔다.
"꺄악!?"
아야메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안개 속에서 스스스…… 하고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그것은 진흙과 낙엽투성이가 된 낡은 천 조각 괴물이었다.
한쪽만 끊어진 끈을 뱀처럼 꿈틀거리며 너덜너덜한 파란 천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루. 자루 한가운데에는 슬픔에 젖은 동그란 눈 두 개가 뻐끔 열려 있었다.
봉투를 주우려던 아야메를 향해 괴물이 끈을 채찍처럼 번쩍 치켜들었다!
"으아아악! 나, 나타났다아아! 유, 유령이다아아!"
타이가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야메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유, 유령……!? 그, 그런 비과학적인 존재 따위 인정 못 해…… 인정 못 한다고……! 히익, 가까이 오지 마아앗!"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이 아야메는 코하루의 케이프 자락을 꽉 움켜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야메, 유령을 무서워하는구나……!)
하지만 지켜내야 한다.
자신을 의심했으면서도 끝까지 함께 진실을 찾아내 준 소중한 친구다.
코하루는 아야메 앞을 가로막아서며 왼손을 힘차게 뻗었다.
"그 \"분실물\", 제가 전해 줄게요! 폿케, 가자!"
"맡겨달라폿케!"
폿케가 코하루의 왼손으로 뛰어들어 새빨간 털실 장갑이 되어 착 감겼다.
"별 돋보기, 오픈!"
키이이잉――!
황동 별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타오르고, 노을빛 주황색 탐정 케이프가 활짝 펼쳐졌다.
머리에는 별 베레모.
거대한 자루 모양의 노라모노가 성난 듯 끈을 쌩쌩 휘두르며 돌진해 왔다.
"으앗!"
거센 바람에 몸이 붕 뜰 뻔했다. 사방에서 끈이 쏟아져 들어와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코하루의 뒤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아야메가 번쩍 눈을 떴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공포를 이겨내고 차갑고 날카로운 빛을 되찾았다.
"……호시카와 양! 오른쪽 매듭을 보렴!"
"어!?"
"저 괴물은 왼쪽 끈이 끊어져 있어서 오른쪽에 무게를 실을 때마다 중심을 잃고 있어! 오른쪽 끈이 토끼장 기둥에 엉키는 순간이 빈틈이야!"
아야메의 맑고 똑 부러진 목소리가 황혼의 공기를 갈랐다.
대단해……! 저렇게 벌벌 떨면서도 꼼꼼하게 관찰해서 약점을 간파해 내다니!
"알았어! 가자, 폿케!"
노라모노가 오른쪽 끈을 크게 휘두른 순간, 토끼장의 나무 기둥에 끈이 칭칭 감겼다.
"지금이다폿케!"
코하루는 단숨에 파고들어 별 돋보기를 노라모노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렌즈 너머로 노라모노의 기억이 아련하게 펼쳐졌다.
십 년 전 어느 봄날.
체육복 주머니를 손에 든 어린 여자아이가 토끼장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어떡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체육복 주머니가 없어졌어…… 엄마가 예쁜 아플리케를 달아준 소중한 주머니인데……』
소녀는 온 힘을 다해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풀숲 깊숙한 곳으로 굴러떨어져 비바람과 흙더미 속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외로워…… 날 데리러 와줘…… 나 줄곧 여기 있었단 말이야……』
"찾았다."
코하루는 별 돋보기를 높이 치켜들고 눈물을 훔치며 다정하게 외쳤다.
"십 년 동안 줄곧 기다렸구나. ――어서 와, 분실물아!"
슈아아아악!
별 돋보기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물결이 노라모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진흙과 검은 안개가 스르르 벗겨져 나가며 포근한 빛의 알갱이들로 변해갔다.
『……고마워……』
그리운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빛의 알갱이는 저녁 하늘로 날아올라 마을 저편으로 흩어져 갔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고요한 황혼의 적막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학급비 봉투뿐이었다.
"해냈다폿케ーー! 대성공이다폿케!"
폿케가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변신이 풀리고 언제나 입던 노란 케이프로 돌아왔다.
"……호시카와 양."
자리에서 일어난 아야메가 어깨를 움츠리며 코하루를 바라보았다.
제비꽃색 리본이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미안해. 정황 증거만 가지고 널 범인으로 단정 짓고…… 못된 말을 했어."
"아냐! 아야메의 추리, 정말 멋있었는걸!"
코하루는 아야메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약점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난 끈에 날아갈 뻔했어! 저기, 구조 양…… 아니, 아야메!"
"어…… 아, 아야메……!?"
아야메의 하얀 뺨이 저녁노을보다 더 새빨갛게 물들었다.
"스,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다니! 우린 겨우 사건 하나를 해결했을 뿐이잖아! 딱, 딱히 너랑 친해진 건 아니거든……!"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맞잡은 손은 빼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코하루와 타이가는 서로 마주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세 사람은 언덕 위의 '분실물의 관'을 찾아갔다.
아야메는 붉은 벽돌 양옥집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수첩을 펼쳤다.
"다이쇼 시대의 기차역……? 공간이 바깥보다 훨씬 넓어……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건축이네……."
그리고 카운터 위에서 멜론빵을 갉아먹고 있는 폿케를 본 순간――.
"난 폿케다폿케! 잘 부탁한다폿케!"
귀를 쫑긋거리며 인사하는 폿케를 보고 아야메는 숨을 훅 들이켰다.
폿케는 손목의 하얀 털을 보송보송 흔들며 두 손으로 멜론빵 조각을 꼭 쥔 채 새까만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뭐…… 뭐지, 저 사랑스러운 털 뭉치는……!?)
아야메의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 있었다.
(새빨간 털실…… 손목의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고…… 너, 너무 귀여워……! 꼬옥 안아주고 싶어…… 집에 데려가고 싶어……! 아니야, 진정해 구조 아야메, 냉철한 학급 반장이 이성을 잃으면 안 돼……!)
아야메는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푸흣…… 아하하! 아야메, 폿케 만져봐도 돼!"
"누, 누가 만진다고 그래! 난 귀여운 것 따위…… 조금이라면 쓰다듬어 줄 수도 있지만!"
조심조심 손끝으로 폿케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야메는 작게 "……보들보들해" 하고 황홀하게 눈을 빛냈다.
그런 아야메를 보며 관장 시오리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야메 양. 진실을 갈구하는 당신의 맑은 눈동자에 이것을 쥐여 드리고 싶군요."
시오리가 건넨 것은 제비꽃색 가죽으로 장정된 아름다운 수첩이었다.
"이것은 『물망초 수첩』. 여기에 기록된 진실은 그 어떤 망각의 마법으로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답니다."
"물망초 수첩……."
아야메는 소중한 보물처럼 수첩을 가슴에 꼭 품었다.
"좋았어!"
타이가가 가슴을 탕 쳤다.
"코하루의 별 돋보기, 반장의 수첩, 그리고 내 튼튼한 다리와 개코! 이걸로 우리 '분실물 탐정단' 결성 완료네!"
"잠깐, 왜 멋대로 결정하는 거야, 이누카이 군!"
"좋잖아, 분실물 탐정단! 멋진걸!"
황혼이 깃든 양옥집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메아리쳤다.
그날 밤.
아야메는 방 책상 앞에 앉아 제비꽃색 물망초 수첩에 만년필을 사각사각 놀리고 있었다.
페이지 맨 위에 반듯하고 꼼꼼한 글씨로 적었다.
『미해결 사건: 괴도 미드나이트에 대하여』
『그는 모리 선생님에게서 추억을 빼앗았을 때, 어째서인지 그 추억의 물건인 악보의 위치를 힌트로 남겨두었다. 마치 우리에게 추억을 되찾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만년필을 내려놓은 아야메는 밤의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쓰키미자카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밤바람이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